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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선교사

1950~1960
잭베스킨

Jack Bashkin
  • 1959년 5월 ~
  • 잭베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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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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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마디로 선교사 중에 선교사이다. 그는 1952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 공병으로 참전함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한다. 당시에 그는 비그리스도인이었다. 따라서 한국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그 무더운 여름 장마와 살을 에이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면서 얼른 집으로 돌아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 끝없이 밀려오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그들을 보면서 ‘저들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 나의 가족일 수도 있겠구나, 다만 하나님이 나를 미국에 태어나는 자비를 주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떠날 때에는 얼른 한국에 관한 슬픈 기억을 지워 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광경은 그 뇌리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찌 할바는 몰랐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 미주리 주 롤라(Rolla, Missouri)로 이주하여 공대 공부를 계속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어네스트 바니(Ernest Baney)목사가 시무하는 성서침례교회에 출헉하게 되었다. 그는 그 목사를 “머리에는 말씀으로 가득하고 마음은 세계를 품고도 남을 작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곳에서 선교의 열정을 가진 제이 씨 브라운(J. C. Brown)박사가 인도하는 부흥회를 통하여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헌신했다. 목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18년 동안 중국 선교사로 섬겼던 프래드 다날슨(Fred Donnelson)박사의 영향을 받아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지난 날 한국 전쟁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광경이 떠오르면서 한국을 선교지로 주저 없이 정하게 되었다.
학업과 견습과정을 마치고 그는 다섯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다. 그는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안식년을 보내는 선배 선교사 표수다 선교사를 돕고 있던 김대현 목사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김대현 목사로부터 한국 풍습과 언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 부부는 매리랜드 대학 한국 분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베스킨 선교사가 시작한 첫 번째 교회는 주견식 목사와 그 동생 옥자, 견자의 동리였다. 처음에는 주견식 목사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주견식 목사는 이날까지도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다. 그 곳을 기점으로 이종환 목사의 고향 동리인 신동과 고(故) 김경주 목사의 고향인 장환도에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들을 세웠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이 김철현 목사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곳의 중심지 관산에도 교회를 개척하여 주위에 퍼져나가는 성과도 보게 된다. 교회가 늘어가고 일꾼이 필요하게 됨으로 선교사는 서울에 신학교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그 학생들은 참으로 열심히 있었고 헌신적이었다고 선교사는 회상한다. 


첫 기간을 보낸 선교사는 귀국하여 교회들을 방문하고 다시 돌아와서 사역을 계속 한다. 이 때에 라서더(Dr. F. C. Laster)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한국에 나와 먼저 와 있던 페트릭 선교사와 김우생 목사와 함께 신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게 된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면서 한반도 동서남북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 때에 탄생한 교회 중에는 경기도 북쪽에 위치한 동패리 교회도 있다.
끝으로 그는 한국에서 성서침례교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마치면서 한국 목사들의 충성과 인내와 희생을 크게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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