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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선교사

1960~1970
워스월리

Worth Worley
  • 1967년 6월 ~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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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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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현재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월리 선교사는 달리는 기관차와 같은 활동가 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는 전도하는 선교사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전도지를 전하고 구령에 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프린스폰에서 태어났다. 6남매의 맞이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군 생활 11년 째 되는 해에 미국 버지니아주 햄튼에서 공군 부대 중사로 주둔하고 있을 때에 홀(Thorn Hall)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주의 부름에 순종하여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목회 생활을 하다가 1966년 성서침례신학교에서 선교사로 인준을 받고 다음 해인 1967년 6월에 한국에 왔다. 당시 그의 가족은 아내 헤이즐(Hazel)과 장녀 진져(Ginger 현재 선교사 아내로 싱가폴 주재), 차녀 죠이(Joy 현재 선교사의 아내로 타이 거주) 그리고 어린 아들 제스(Jath 미국 거주)였다. 그리고 , 한국에 와서 낳은 아이가 이제는 4자녀의 어미요, 러시아 주재 선교사의 아내가 된 줄리(Julie)이다.
그는 1년 동안 연세대학에서 어학 공부를 마치고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대전으로 이주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대전 대흥교회, 서대전 교회 그리고 탄동면에 숫골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박경보, 김베드로, 김윤배 그리고 김주성 등의 구원과 헌신을 보았고 그 때에 얻은 영혼이 후일 대전 대흥교회에 오랜 목사로 쓰였던 김종성 목사이다.
그가 사역한 일 중에는 부산에서 올라온 신학교를 돕는 일도 포함된다. 대전에 있는 동안 그는 옥천에 개척교회를 시작하였고 옥천 청소년 캠프장을 마련하였다.
1971년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다시 1972년에 한국으로 와서 연세대학에서 한국어 수업을 마치고 그는 대구로 이주를 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추인호 목사와 함께 대구성서침례교회를 개척하였다.
후에 그는 내당 교회를 방의택 목사와 함께 시작하였고, 1975년도에는 방송사역을 시작하여 국내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구 사역을 통하여 헌신된 목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주성 목사(사랑교회 시무), 밀양교회를 시무하는 이철규 목사, 포항교회를 시무하는 한영철 목사, 의정부교회의 황을수 목사, 서진교 목사 그리고 호주에서 사역하는 김진수 목사 등이다.
197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후원하는 교회들에게 선교 보고를 마치고 1983년에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 사역하는 동안 주의 부름을 강력히 느끼고 싱가폴로 이주하여 96년에는 러시아로 인도함을 받고 현재까지 쓰임을 받고 있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실하게 주의 뒤를 따라 살고 있다. 그의 고향 미국 노스 케롤라이나 교회 사람들은 그를 선교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 못지 않게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역은 구령의 열정 못지 않은 열성적인 학구열이다. 그가 선교사 활동을 하는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한문적 업적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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